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문단 편집) === 3차례의 놀라 공방전 === 마르켈루스의 행적은 켈트족과의 전쟁에서 맹활약한 후 몇년간 전해지지 않는다. [[제2차 포에니 전쟁]] 초기에 [[한니발 바르카]]가 이탈리아에 쳐들어와서 [[트레비아 전투]], [[트라시메노 전투]], [[칸나이 전투]] 등 여러 전투에서 로마군을 상대로 완승을 거두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마르켈루스는 별다른 행적을 보이지 않았다. 일부 학자들은 기원전 217년 시칠리아 함대의 사령관으로 부임한 [[티투스 오타킬리우스 크라수스(시칠리아 총독)|티투스 오타킬리우스 크라수스]]를 보좌했을 것이라 추정한다. 오타킬리우스는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아내의 조카딸과 결혼했기 때문에, 마르켈루스는 파비우스 가문과도 연관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러던 기원전 216년, 푸블리우스 푸리우스 필루스와 함께 법무관으로 선임되었다. 그는 시칠리아를 근무지로 배정받은 뒤 로마의 항구인 오스티아에 가서 시칠리아 해안을 위협하는 카르타고 함대에 맞설 로마 함대를 규합했다. 그러다가 칸나이 전투에서 완패한 뒤 남은 장병들이 카누시움에 피신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원로원은 필루스를 시칠리아로 보내고 마르켈루스에게 카누시움으로 가서 패잔병들을 이끌라고 지시했다. 이에 따라 카누시움으로 향하고 있던 중, 캄파니아의 수에술라 인근에서 놀라 시의 사절단과 대면했다. 당시 놀라 원로원과 지도층은 로마를 계속 따르려 했지만, 놀라 시민들은 자기들 농경지가 카르타고군에게 파괴되는 꼴을 더 이상 지켜볼 수 없었고, 로마가 한니발에게 패망할 게 분명하다고 보고 한니발의 편에 들고 싶어 했다. 놀라 원로원은 시민들의 의견을 따르는 척하면서, 마르켈루스에게 이 사실을 밀고하며 자신들을 도와달라고 청했다. 마르켈루스는 즉시 놀라로 달려가 그곳의 치안을 안정시켰다. 한편, 한니발은 주요 항구 도시인 네아폴리스(오늘날 [[나폴리]])를 회유해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려 했지만, 네아폴리스 주민들이 로마를 확고히 지지한 데다 네아폴리스가 천혜의 요새로 명성이 자자헀기에 감히 공성전을 벌이지 않고 누케리아로 이동했다. 누케리아 시민들 역시 회유에 넘어가지 않자, 한니발은 누케리아 시를 포위 공격하여 며칠만에 함락시키고, 도시를 철저하게 파괴하고 시민들을 노예로 삼았다. 누케리아 시의 운명을 전해들은 놀라 시민들은 몹시 두려워했고, 일부는 한니발에게 서신을 보내 놀라로 온다면 항복하겠다고 제안했다. 한니발은 즉시 누케리아에서 출진하여 놀라로 진군했다. 이때 마르켈루스는 누군가가 적과 내통하고 있을 거라 여기고, 그들이 성문을 몰래 열어줄 틈을 주지 않기 위해 전군을 성벽 바로 앞에 포진하게 했다. 이후 양자는 소규모 접전을 벌일 뿐, 본격적인 전투를 벌이지 않았다. 그러던 중 몇몇 원로원 의원이 마르켈루스를 찾아와서 시민들과 카르타고인들 사이에 밀담이 오갔다고 보고했다. 로마군이 도시를 나선 사이에 시민들이 성벽을 점령하고 성문을 걸어잠가서, 로마군이 성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카르타고군에게 몰살당하게 만들려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의원들에게 알려줘서 고맙다며 감사를 표한 뒤, 군대를 세 갈래로 나누어 적과 마주보는 세 개의 문 앞에 각각 두었다. 또한 보급품들을 군대의 바로 뒤편에 배치했다. 중앙 성문에는 자신의 군단 중 가장 우수한 군단과 로마 기병을 배치했고, 측면의 2개 문 뒤에는 신병과 [[벨리테스]], 라틴 동맹 기병대를 배치했다. 아울러 시민들이 성벽 위에 올라가거나 성문에 접근하는 걸 금지했다. 한편, 한니발은 군대를 이끌고 성 가까이 진군했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적이 출격하지 않고 성벽에 무장한 병사가 없는 걸 이상하게 여기다가, 놀라 시민들과 짠 계획이 들통났다는 걸 깨달았다. 이에 군대를 진영 안으로 들어보낸 후 시민들이 봉기할 때 본격적으로 공격하기로 했다. 한니발이 군을 돌려 돌아갈 때, 마르켈루스가 전군에 돌격 명령을 내렸다. 이에 나팔수가 나팔을 요란하게 불렀고, 로마군은 즉시 출격하여 후퇴하는 적병을 향해 맹렬히 돌격했다. 적이 이토록 맹렬하게 돌격할 거라고는 예측하지 못했던 카르타고군은 2,800명의 병력을 잃고 패퇴했다. 반면 로마군의 사상자는 500명에 불과했다. 그 후 한니발은 놀라 공략을 단념하고 아케라로 향했다. 마르켈루스는 성문을 닫고 아무도 나갈 수 없도록 보초들을 배치한 뒤, 적과 밀담을 나눈 자들을 색출해 70명 이상을 체포한 후, 반역 혐의로 처형하고 재산을 몰수하여 로마로 보냈다. 이후 도시 운영을 놀라 원로원에게 맡긴 뒤 수에술라 언덕으로 이동하여 한니발의 움직임을 관찰했다. [[1차 놀라 공방전]]의 규모 자체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칸나이 전투의 참패에 깊이 상심해 있던 로마인들에게 희망을 안겨주기 충분했고, 마르켈루스는 이 일을 계기로 로마인들의 지지를 한 몸에 받았다. 그 결과, 마르켈루스는 총독의 권한을 부여받고 남부 이탈리아에서 한니발에 계속 대적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이후 기원전 215년 초 집정관 [[루키우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기원전 234년 집정관)|루키우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가 [[실바 리타나 전투]]에서 전사한 후 열린 집정관 선거에서 마르켈루스가 당선되었다. 그러나 원로원은 평민 출신 집정관이 두명 뽑힌 것에 반감을 품고, 불길한 징조를 핑계로 마르켈루스의 취임을 무효로 처리하고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를 보결 집정관으로 선출했다. 파비우스는 집정관에 선출된 뒤 마르켈루스에게 수에술라 언덕에 주둔한 군대를 계속 통솔하도록 했다. 마르켈루스는 놀라에 본거지를 마련한 뒤, 한니발에게 굴복한 이르피니와 산타니 카우디니 일대를 약탈하고 주거지를 불태웠다. 두 지역 지도자들이 한니발에게 사절을 보내 자신들을 도와달라고 호소하자, 한니발은 그들에게 풍부한 선물을 주며 곧 도우러 가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마르켈루스가 한창 약탈에 열중하고 있는 사이에 놀라를 포위하길 희망해 강행군했다. 그러나 마르켈루스는 항상 퇴로를 마련해둔 채 급습 작전을 벌였고, 정찰병들을 수시로 사방에 보내 한니발의 움직임을 확인하게 했다. 얼마 후 한니발이 전속력으로 놀라로 진군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자, 그는 즉시 전군을 놀라 시내로 이동시켰다. 자신이 한발 늦었다는 걸 알게 되자, 한니발은 도시를 포위한 뒤 성벽을 향해 진군하게 했다. 그때 마르켈루스는 기병대를 이끌고 성문 바로 앞에 있다가, 적이 성벽으로 바짝 다가갔을 때 성문을 열고 갑작스럽게 출격해 적군을 기습했다. 카르타고군은 갑작스러운 공격으로 다소 희생을 치렀지만 곧바로 반격했다. 이때 폭우가 내려 전투가 중단되었고, 양측 모두 철수했다. 다음날까지 비가 내렸기 때문에, 양군은 한동안 전장에 나가지 않았다. 놀라 시를 포위한 지 사흘째 되던 날, 한니발은 놀라 시 주변의 농경지를 약탈하기 위해 일부 병력을 파견했다. 마르켈루스는 적 진영에 사람이 줄어든 걸 보고 전군을 이끌고 성문을 박차고 나와 쳐들어갔다. 한니발은 진영에 남아있는 병사들을 이끌고 평원에 진을 치고 맞서는 한편, 농경지로 파견했던 병사들을 소환했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에 따르면, 마르켈루스는 병사들에게 다음과 같이 격려했다고 한다. >"카르타고인들은 카푸아의 쾌락에 빠졌다. 그들은 겨울 내내 술과 창녀들과 즐거운 나날을 보내면서 쇠약해졌다. 과거의 힘과 활력은 떨어졌고, 피레네 산맥과 알프스 산맥을 넘나들던 투지가 사라졌다. 그들은 이제 자신들의 팔다리와 무기를 거의 들지 못한다. 카푸아는 한니발의 '칸나이 패배'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이후 벌어진 [[2차 놀라 공방전]]에서 로마군은 1,000명 가량의 사상자가 발생한 반면 카르타고군은 5,000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600명이 포로로 붙잡혔다고 한다. 하지만 현대 학계에서는 리비우스가 과장했다고 간주한다. 한니발은 상황이 불리해지자 군대를 도로 진영으로 불러들었고, 마르켈루스는 농경지를 약탈하던 적군이 돌아오는 걸 보고 도시로 돌아갔다. 사흘 후 누미디아, 이베리아 기병 272명이 로마군에 귀순했고, 로마는 이에 대한 보상으로 정착할 토지를 줬다. 기원전 214년 집정관 선거에서 [[티투스 오타킬리우스 크라수스(시칠리아 총독)|티투스 오타킬리우스 크라수스]]와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길루스가 당선되었다. 그러나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가 여기에 문제를 제기했다. 그는 두 집정관 당선인의 군사적 역량이 떨어진다며 첫번째 부족에 대한 재투표를 요구했다. 이에 오타킬리우스와 아이밀리우스 지지자들이 반발하면서 혼란이 벌어졌다가, 귀족 가문 사이에 타협안이 마련되었다.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와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가 기원전 214년 집정관에 선출되었고, 오타킬리우스는 두번째로 법무관을 맡기로 했다. 파비우스와 마르켈루스는 18개 군단을 일으켜 한니발의 카르타고군과 로마를 배신한 [[카푸아]]에 투입하기로 결의했다. 한니발은 이 소식을 전해듣자 즉시 아르피를 출발해 티파타 산에 숙영지를 세우고 누미디아와 이베리아 병사 일부를 배치해 숙영지 및 주변 도시들을 방어하도록 맡긴 뒤, 자신은 나머지 군대와 함께 아베르누스 호수로 이동했다. 그는 푸테올리의 로마 수비대를 공격하는 걸 염두에 뒀다. 파비우스와 마르켈루스는 한니발이 아르피를 떠나 캄파니아로 이동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밤낮으로 행군해 군대에 합류했다. 두 사람은 전직 집정관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기원전 215년 집정관)|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에게 베네벤툼으로 이동하여 한니발의 부하 [[한노(보밀카르의 아들)|한노]]가 한니발과 합세하는 걸 막으라고 지시했다. 또한 파비우스의 아들은 [[소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는 그라쿠스가 있던 아풀리아로 가서 그를 대신해 임무를 수행하도록 했다. 한니발이 아베르누스 호수 근처에 이르렀을 때, 몇몇 젊은이가 찾아와서 타렌툼으로 와서 그의 편에 서고 싶으니 로마인들로부터 도시를 해방시켜달라고 간청했다. 한니발은 그들의 용기를 칭찬하며, 적절한 시기에 개입할 테니 집으로 돌아가서 계획이 실행될 수 있도록 준비해달라고 요청했다. 이후 푸테올리로 진군한 한니발은 사흘간 포위했지만, 6,000명의 병사들이 철저한 방비를 한 그곳을 공략하긴 어렵다고 보고, 주변 일대를 철저히 약탈한 뒤 놀라로 이동했다. 이때 놀라 주민들이 반란을 일으켜 친 로마 인사들을 축출한 뒤, 한니발에게 사절을 보내 어서 놀라로 와달라고 요청했다. 한니발은 즉시 놀라로 진군해, 이번에야말로 그곳을 공략하려 했다. 하지만 마르켈루스 역시 놀라 귀족으로부터 주민들이 반란을 일으켰으니 서둘러 와달라는 요청을 받았고, 즉시 수에술라 언덕으로 이동한 뒤 보병 6,000명과 기병 300명을 선발해 놀라로 도착하여 반란을 일으킨 자들을 모조리 숙청했다. 마르켈루스는 한니발이 곧 도착할 거라 예상하고,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에게 기병을 맡겨 카르타고를 우회하여 후방을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이후 한니발이 놀라에 도착하자 마르켈루스가 즉각 출격하면서, 양측은 반나절 동안 접전을 벌였다. 하지만 양측 모두 이렇다할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날이 어두워지자 각자의 진영으로 돌아갔다. 한편, 클라우디우스 네로는 기병을 이끌고 전장을 우회하여 진군했지만, 모종의 이유로 진군이 늦어져서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전투가 끝나 있었다. 그는 본진으로 돌아간 뒤 마르켈루스의 꾸중을 받았지만 별다른 처벌을 받지는 않았다. 다음날 로마군이 평원에 재차 전투 대형을 펼쳤지만, 한니발은 숙영지에 그대로 남았다. 이후 한니발이 놀라 공략을 단념하고 철수하면서, [[3차 놀라 공방전]]이 마무리되었다. 마르켈루스는 놀라에 2,000명의 수비병을 남겨둔 뒤 한니발과 동맹을 맺은 카실리눔을 포위하고 있던 파비우스와 합세해 맹공을 퍼부은 끝에 함락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